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런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행복 - 유치환

지식/시 2011/10/21 00:49
행 복 - 유치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나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헝클어진 머리칼

18, 「清水(きよみづ)へ、祇園(ぎをん)をよぎる、櫻月夜(さくらづきよ)、こよひ逢ふ人、みなうつくしき」 기요미즈에, 기온 지방을 지나는 벚꽃 핀 달 밤 오늘 밤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아름답도다.

요술 - 한용운

지식/시 2010/08/22 21:12

가을 홍수가 작은 시내의 쌓인 낙엽을 휩쓸어 가듯이,
당신은 나의 환락의 마음을 빼앗아 갔습니다.
나에게 남은 마음은 고통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가기 전에는 나의 고통의 마음을 빼앗아 간 까닭입니다.
만일 당신이 환락의 마음과 고통의 마음을 동시에 빼앗아 간다.하면,
나에게는 아무 마음도 없겠습니다.

나는 하늘의 별이 되어서 구름의 면사로 낯을 가리고 숨어 있겠습니다.
나는 바다의 진주가 되었다가,
당신의 구두에 단추가 되겠습니다. 
당신이 만일 별과 진주를 따서 게다가 마음을 넣어         
다시 당신의 님을 만든다면, 그때에는 환락의 마음을 넣어 주셔요.
부득이 고통의 마음을 넣어야 하겠거든,
당신의 고통을 빼어다가 넣어 주셔요   
그리고 마음을 빼앗아 가는 요술은 나에게는 가르쳐 주지 마셔요.
그러면 지금의 이별이 사랑의 최후는 아닙니다.

落照

지식/시 2010/05/30 21:39

朴文秀 落照
落照吐紅掛碧山 석양 노을 붉게 푸른 산에 비꼈는데
寒鴉尺盡白雲間 차가운 하늘에 갈가마귀 흰 구름 사이로 날아가네

放牧園中牛帶影 뒷동산에 풀어놓은 소 그림자 길기만 한데
亡夫臺上妾底환 망부대위의 임을 기다리는 아낙네, 낭자머리 고즈넉하다

問津行客鞭馬急 나루터를 묻는 나그네 말채찍이 급하고
尋寺歸僧杖不閒 절을 찾아가는 늙은 중의 지팡이가 한가롭지 않네

蒼烟古木溪南路 푸른 저녁연기 고목에 걸린 남쪽 길에는
短髮樵童弄笛還 더벅머리 초동이 피리 불며 돌아오네

사랑 - 김용택

지식/시 2010/03/01 00:00

사  랑

김 용 택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 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컷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 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가을이라면 한 번 정도 떠오를 만한 시
낙엽을 보다가 생각이 났다

구르몽의 낙엽 (Remy de Gourmont / Les feuilles mortes)

Simone, allons au bois: les feuilles sont tombées;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Elles recouvrent la mousse, les pierres et les sentiers.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Elles ont des couleurs si douces, des tons si graves,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Elles sont sur la terre de si frêles épaves!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Elles ont l'air si dolent à l'heure du crépuscule,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Elles crient si tendrement, quand le vent les bouscule!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Quand le pied les écrase, elles pleurent comme des âmes,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Elles font un bruit d'ailes ou de robes de femme: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Viens: nous serons un jour de pauvres feuilles mortes,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Viens: déjà la nuit tombe et le vent nous emporte.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인연설

                                                                한 용  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안합니다.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작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한다는 증거요.
가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있음을 기뻐하고,
더 좋아지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애처롭기까지만 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 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 사람의 기쁨이라 같이 기뻐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않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렵니다.

신과의 인터뷰

지식/시 2008/01/01 18:09
어느 날 나는 신과 인터뷰하는 꿈을 꾸었다.
신이 말했다.
'그래,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구?'
내가 말했다.
'네, 시간이 있으시다면.'

신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의 시간은 영원.
내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
무슨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가?'

내가 물었다.
'인간에게서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었인가요?'

신이 대답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서둘러 어른이 되는 것
그리고는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다 잃는 것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쳐 버리는 것
그리하여 결국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
그리고는 결코 살아 본 적이 없는 듯 무의미하게 죽는 것.'

신이 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런 다음 내가 겸허하게 말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자식들에게 그 밖에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신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있음을 기억하기를.
언제나, 모든 방식으로.'